여기서 하나 더 눈여겨봐야 할 게 있습니다. 중국 세관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반도체 장비의 수입액은 전년 대비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수입이 줄어 우리의 수출이 따라 줄어든 게 아니라 중국이 수입을 늘렸음에도 우리나라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은 오히려 줄어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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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에는 대중국 흑자를 기록 중인 10대 품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무역수지가 악화됐습니다 |
ⓒ 한국무역협회 보고서 |
우리가 중국과 대립하는 동안 중국 점유율 높인 나라들
이런 사례는 또 있습니다. 지난 2월, 무역협회가 내놓은 "최근 대(對)중국 무역수지 적자 원인 진단과 평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석유제품, 컴퓨터 등 3개 품목은 중국의 대(對)세계 수입이 증가한 반면, 우리의 대(對)중국 수출과 시장 점유율은 모두 하락"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주요 수출품목 중 중국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점유율이 상승한 품목은 전무"하다는 게 무역협회의 분석입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내내 우리 수출이 회복되지 않는 이유가 중국의 경기가 좋지 않아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수입을 늘려도 우리나라 제품에 대한 수입은 비례해서 늘지 않았다고 보고서는 이야기합니다.
보고서 내용을 조금 더 볼까요? "대(對)중국 무역수지를 주도하는 20개 품목(흑자 10+적자 10) 중 15개 품목의 수지가 감소"했으며, 특히 흑자를 기록 중인 10대 품목의 경우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무역수지가 악화됐습니다. 무역수지 악화는 반도체, 합성수지, 비누 치약 및 화장품, 무선통신기기 등 특정 분야를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무역수지 악화는 우리가 수출한 것보다 더 많이 수입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중국이 수입하는 상위 20대 품목 중에서 13개 품목이 중국 수입시장에서 점유율이 하락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점유율이 하락한 품목에서 아세안, 일본, 미국, 대만 등의 점유율이 상승해 우리 몫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반도체 동맹이라며 중국과 대립하는 동안 아래에서 보듯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리 대신 중국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점유율 상승국가 : 석유제품(말련), 반도체장비(네덜란드, 싱가포르), 컴퓨터(베트남, 대만), 반도체(일본, 대만), 합성수지(미국, 일본), 기초유분(미국, 말련), 디스플레이(대만, 독일), 화장품(프랑스, 이태리), 기구부품(독일,태국), 철강(인니), 광학기기(태국,일본), 계측제어기(미국,독일), 동제품(콩고,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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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대중국 주력 수출 제품의 점유율이 떨어지고 그 자리를 다른 나라가 차지하고 있다는 보고서 내용 |
ⓒ 무역협회 |
중국 벗어나니 2년 연속 무역적자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보고서는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약화 돼서 그렇다고 합니다. 수십 년간 중국에서 연간 10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의 흑자를 내며 승승장구하던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왜 하필이면 대통령님 취임 직후부터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걸까요?
대통령님이 한미일 반도체 동맹국의 일원으로 탈중국 선언을 하고, 중국의 역린인 양안 관계에 개입하면서 모든 관계에서 중국과 멀어졌습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님과 보조를 맞춰 "중국 벗어나니 세계가 보이더라, 중(中)의 압박이 부른 반전" 같은 기사로 탈중국을 부추겼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 31년 만의 첫 무역수지 적자라는 충격적인 성적표 아닐까요? 2년 연속 연간무역수지 적자는 도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반도체 분야에서 대중국 규제를 선언하며 크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이처럼 실제로는 예전과 별단 다르지 않게 반도체 장비 무역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에게 중국은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고객이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아 수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이 세 나라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사고 싶지 않아도 기술적으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입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중국은 우리 반도체 장비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고객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반도체 장비는 각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산 장비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장비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잃은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을 네덜란드와 싱가포르가 벌써 가져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중국을 향해 규제의 목소리를 높여도 그 나라 기업들은 방법이 있지만, 우리 정부가 중국과 다툼을 벌이면 우리 기업들은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조업 경쟁국인 중국과 반도체 가치사슬을 두고 머리를 맞대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중국에 적대적이기만 한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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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가진 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박장범 KBS 앵커와 대담을 하고 있다. |
ⓒ 대통령실 |
대통령님은 지난 2월 4일 KBS와의 특별대담에서 중국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묻는 앵커의 질문에 "한중관계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우려할 거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수교 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국 무역적자를 낸 상황에서도 한중관계를 우려하지 않는 대통령님을 보면서 저런 정치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상황이 길어진다면, 정치를 바꿔야겠단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그렇게 될 날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